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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알리미

서희에 대해서 알아보자!

by 역사지키미 2022. 6.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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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란 누구인가?

 우리나라 위인들 중에는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 진가가 제대로 비춰지지 못한 분들이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이 고려 시대의 서희라고 생각합니다. 서희의 외교 단판으로만 알고 있는 서희 그런데 서희의 이 외교 단판이 왜 그렇게 대단한 것이고 왜 한국사에 있어서 늘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히는지까지는 잘 모르는 분들이 있던데 서희와 고려대 거란의 1차 전투를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서희는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경기도 이천을 기반으로 하는 명망 있는 호족 집안 출신입니다. 서희의 아버지 이름은 서필인데 호족들이 연합하여 고려를 세웠다지만 고려 4대 왕이었던 광종은 호족들의 힘이 지나치자 나라를 피바다로 만들 정도의 대대적인 호족 숙청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광종의 심기를 건드리면 매일 아침을 장담하지 못하게 되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매일 체포되는 호족의 수와 처형되는 호족의 수는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살벌한 시대였습니다. 이때 서희의 아버지 서필은 강력한 지방 호족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습니다. 그냥 살아남은 정도가 아니라 재상으로 있으면서도 광종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죠.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광종이 서필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했지만 또 광종이 유일하게 믿는 호족 출신의 신하가 서필이었습니다.

 서희는 이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죠. 서희는 18살 때 그 어렵다는 과거 문과에 급제했으니 천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고려사 서희 열전의 기록에 따르면 서희의 성품이 엄정하고 조심스러웠다고 나와 있습니다. 이후 그의 젊은 시절은 별다른 기록이 없으나 그의 나이 40살 때 송나라의 사신으로 파견됩니다. 그런데 당시 고려가 거의 10년 정도 송나라와 왕래가 없었는데 이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에 서희가 책임자로 임명되었던 거죠. 이때 송나라 황제가 서희의 말발에 감동해서 서희에게 관직도 주고 그랬습니다. 떡잎부터 달랐던 거죠. 본격적으로 서희가 활약하게 되는 고려와 거란의 1차 전투에 대해 시작하겠습니다.

고려와 거란의 1차 전투

 그때는 바야흐로 10세기 고려가 건국된 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았을 때입니다. 당시 동북아시아에는 큰 국가가 3개 정도 있었습니다. 중국의 속나라 한국의 고려 그리고 요동 지역에서부터 몽골 일부 지역까지 아우르며 속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던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이렇게 큰 형님들이 있었고 거란족과 고려 사이의 만주 지역에는 여진족들이 부족 단위로 흩어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중에서 사이가 제일 안 좋은 두 국가는 어디였을까요. 당연히 국경을 맞대고 있던 송나라와 거란족의 요 나라였습니다. 가뜩이나 거란족의 요나라가 송나라 건국 전부터 전통적으로 중국의 영토였던 지역을 차지하고 있어서 송나라에게 그 지역을 탈환하는 게 민족적 과제 같은 거였습니다. 그렇다면 고려는 누구랑 더 친하고 누구랑 더 어색한 사이였을까요.

 고려는 건국 직후부터 기본적으로 중국의 속나라와 친하고 거란족의 요 나라를 배격하자는 외교 노선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걸 친송 배우 정책이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누가 봐도 속 나라가 더 큰 나라고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선진국임에는 분명할 뿐더러 당시 고려는 거란족을 되게 낮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가 가치 고구려를 계승한 발레까지 멸망시켰으니 마음이 거란족 쪽으로 가기가 쉽지가 않았을 겁니다. 이러면 거란족 입장에서 굉장히 불안해집니다. 물론 군사력으로는 거란족이 자신이 있었지만 송나라와 고려를 모두 상대한다면 그건 또 다른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거란족이 지리적으로 송나라와 고래 사이에 있기 때문에 양쪽 모두와 싸우기가 곤란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거란족은 송나라와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기 전에 고려에 대해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친하게 지내거나 싸워서 복숙시키거나 전자는 당연히 안 되겠죠. 그러면 거란 조개기의 방법은 하나인 겁니다. 고려가 거란족의 요나라를 안 좋게 생각한 건 맞지만 그렇다고 싸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동시에 속나라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교류는 하지만 그렇다고 속나라를 위해서 군사력을 동원해 같이 싸워줄 생각도 없었고요 그게 고려에 뭐가 도움이 된다고 싸워줘요. 그래도 거족 입장에서는 불안하긴 하겠죠. 원래 거란족은 부족 단위로 흩어져 있던 여진족을 만주에서부터 쓸고 내려옵니다. 여진족 얘네들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어서 거란족은 배후를 확실히 하려면 이 여진족들도 조져놔야 겠죠. 여진족들은 쭉 밀리다가 고려 국경까지 내려오고 일부 도망친 여진족들이 지금 거란족이 고려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정보를 건네줍니다. 이때 고려 정부는 무시했습니다. 속나라가 있는데 멍청하게 대군을 동원해서 고려로 쳐들어올 리가 없다고 보는 거죠. 시간이 좀 지나 또 도망쳐 고려로 들어온 여진족 개들이 진짜 거란족이 고려 국경까지 다 왔다고 경고했으나 이번에도 고려 정부는 듣는 둥 마는 둥 흘려했습니다. 그런데 진짜로 왔습니다. 993년 10월 거란족 황실의 사위였던 소손영이 80만 명을 이끌고 고려 국경을 넘은 겁니다.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족 부대가 어떤 경위로 고려로 들어왔는지는 해석이 분분합니다.

 거란 황실의 지시로 쳐들어왔다는 설도 있고 여진족 털다가 턴 김에 고려까지 내려왔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런데 거란 황실의 지시로 쳐들어왔다고 하기엔 너무 볼품 없이 내려왔고 고려 정부가 방심한 것도 그 정도 대군이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다는 뜻이거든요. 그렇지만 여진족 털다가 내려왔다 하기에도 의아한 점이 있습니다.

 온 김에 고려도 한번 가볼까 이렇게 약할 정도로 생각하고 온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는 비정규군이라면 나중에 서휘와 공식적인 외교 협상이 어떻게 가능했으며 이걸 또 어떻게 거란 정부가 받아들였을까요. 여하튼 거란족이 국경을 넘자 고려 시대 판 해병대라고 할 수 있는 정예 기병부대가 투입이 됩니다.

 그런데 이 정예 기병부대가 지금의 평안북도 구성시인 봉산성에서 박살이 나고 지휘관이었던 윤소한 장군은 포로가 됩니다. 고려 조정은 난리가 납니다 고려 조정은 허친을 맺고 항복하자는 쪽과 영토를 내어줘야 제에 돌아간다며 황해도 위로 전부 거란족에게 영토를 하랑해주자는 지론 2개로 나뉩니다. 둘 다 싸우지 않겠다는 소리죠 참 답답하죠. 이때 서희를 비롯한 극소수만 싸우자고 고집했습니다. 서희의 의견은 사실상 묵살되었고 그래도 저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는 보자며 고려 조정에선 소손영이 진행해 사신을 파견합니다. 그런데 소수 형은 원하는 바를 제대로 말하지도 않고 그냥 한복만 요구했던지라 별 소득 없이 돌아옵니다. 서희는 계속 전쟁을 고집했습니다. 서희도 나름 이유가 있었던 건 서희는 소소영의 군대가 절대 80만이 아니라고 확신했습니다. 훨씬 많이 움직이면 고려 조정에 포착 못할 리가 없고 80만이나 데리고 왔으면 바로 고려 수도로 진격해도 되는데 소순 형은 진격도 안 하고 국경 조금 넘고 나서 겁만 주고 있었거든요. 고려가 결정을 못하고 있자 소수 형은 더 겁을 줘야겠구나 생각해서 청천강을 건넌 뒤 평안남도 끝자락에 있는 안용진을 공격하다가 안용진에 있던 중랑장 대도수의 활약으로 성 함락에 데려 실패해버린 겁니다. 이때 서희가 확신했죠. 거란족 제네 100% 퍼시만 안 되고 별거 없구나 왜냐하면 안용진이 그렇게 큰 성도 아니었고 거란족에 진근 루트를 생각하면 비효율적인 루트로 위해를 했거든요. 겁을 줄 거면 확 밀어붙여서 크고 고려에게 중요한 그런 성을 함락시켜야 할 거 아니에요. 안용진 저 작은 성 하나 한 명 못 할 정도면 비벼볼 만하다 최근 여러 학자들은 당시 소소년이 동원한 군대가 많아봤자 6만 명 그것도 많다고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서희는 당시 고려의 6대 국왕이었던 성종에게 적장과 담판을 짓겠다며 성종의 허락을 받고 직접 소선영을 찾아갑니다. 안용진 작은 성 하나 함락 못 시켜서 본인도 민망해서인지 소손 영은 그제서야 협상 테이블에 진지하게 임합니다.

 우리가 학창시절 때 배운 발언은 소소년이 거란족의 요나라야말로 고구려의 옛 영토에서 발행했으니 고구려의 후회다 고구려 영토를 다 내놓아라라고 말하자 서희가 무슨 소리냐 고려야말로 고구려를 계승했다. 국가 이름도 똑같이 했고 수도도 고구려의 옛 수도 평양과 가까운 개경이 아니냐 이러니까 논리해진 소선영이 군대를 물렸다고 하는데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됩니까 저도 학창 시절엔 고작 그 이유 때문에 거란족이 쳐들어왔고 고작 그 이유 때문에 돌아갔다고 이렇게 의심을 좀 했는데 물론 이런 대사를 서로 안 한 건 아닙니다. 했는데 이건 그냥 초반 상호 간의 기선 제압일 뿐이었고 알맹이는 다음입니다.

서희 외교담판

 소순형은 서희에게 거리로는 거란족의 요나라와 고려가 더 가까운데 왜 송나라와만 교류하냐고 묻습니다. 이게 본심이죠. 그리고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거란 중에 뭘 원하는지 서희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희가 제안을 하죠. 고려가 거란족과 교류하지 않은 건 그 사이에 여진족들이 있어서 못했고 고려와 거란이 연합해서 여진족들을 토벌한 다음 청천강 이북을 고려 땅으로 인정해 준다면 송나라와 국교를 끊고 거란족과 교류하겠다고 제안합니다. 거란족은 고려가 송나라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약속만 받아가면 그만인데 여기에 눈에 가시 같던 여진족까지 토벌해 준다고 하니 거란족 입장에서는 이득이죠. 거기에 여진족이 없으면 나중에 고려 침략이 더 쉬워지니까 소손영은 얼씨구나 하고 제안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물립니다.

 이게 그 유명한 서희의 외교 단판이고 거래와 외교와 신경전은 상대방에게 절대 거절하지 못하는 거래를 제한하라는 철칙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말해주는 사례죠 이 덕분에 이후 고려는 실제 여진족들을 토벌하고 청천강 이북 지금의 평안북도 부근에 흥화진 귀주 통주 곽주 철주 융주 6개의 행정구역을 설치하니 바로 강동 6주입니다. 적군이 침략해 왔는데 오히려 영토가 넓어진 세계사적으로도 정말 흔치 않은 사건이었죠. 그런데 소손형은 고려가 강동 6주까지 영토를 넓히면 오히려 나중에 거란족이 고려를 침략하기 쉬워지기 때문에 소선형이 오케이 한 건데 상대방이 뭘 원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고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때 내가 손해 보는 장사도 안 되고 내가 호구가 되는 거래를 해서도 안 되죠 서희가 그걸 몰랐을 리가 없죠. 청천강 이북 강동 6주의 땅은 국방면에서 정말 천해의 조건을 갖춘 방어선입니다. 고구려 때도 그랬고 나중에 청일전쟁 러일 전쟁 때도 중요한 곳이 됩니다. 비록 거란족과 국경을 맞대게 되지만 고려는 방어선이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고려가 더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거란족의 2차 3차 침입 때 이 방어선 덕분에 승리하거든요. 서희가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건 웬만한 정보력 분석력 판단력 담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겁니다. 어떤 분들은 서희의 최종 목표는 후대 세종대왕의 목표였던 압록강까지 가는 것이었다고도 말합니다. 그러나 서희는 강동 6주 개척에 너무 열을 올렸는지 과로사로 998년 사망합니다. 당시 57세의 나이였기 때문에 요절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 할 일이 많으신 분이 돌아가셨던 거죠. 

오늘은 서희선생님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다음에도 재미있는 이야기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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